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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벽

corgan 2009. 11. 15. 21:25
Introduction

미국은 독서가들의 나라라고 할 수도 없고 아무리 좋게 말한다고 해도 소설이 득세하는 나라라고도 할 수 없다. 20세기 들어서 소설가로는 단 두 명만이 미국의 평범한 대중에게 이름을 날렸다.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트루먼 카포티다. 이 둘은 그들의 탁월한 작품과는 거의 상관 없이 그보다 좀 더 미덥지 못한 방식으로 사람들 눈에 띄고 성공을 거두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키가 크고 건장한 몸집에 턱수염을 기르고 활짝 웃는 얼굴의 헤밍웨이는 <라이프>나 <룩>, <에스콰이어> 같은 잡지에서 낚싯대나 엽총을 들고 있거나 죽을 운명에 처한 불운한 스페인 황소 옆에 있는 사진을 통해 미국의 일반 대중과 친근해졌다. 반면, 몸집이 자그마하고 새된 목소리의 카포티는 캔자스 시골에서 일어난 일가족 살인 사건을 다룬 논픽션을 출간한 직후, 수많은 텔레비젼 토크쇼에 초대를 받는 스타가 되었다. 그후로 술과 마약에 탐닉하여 과거의 자아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긴 했어도 그 명성만은 계속 유지되었다. 헤밍웨이가 1961년 엽총으로 자살하고 카포티는 1984년 무절제한 약물 및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한 후, 그들의 작품들은 지금까지 계속 불만을 품은 비평가들과 독자들에게 혹평을 받아왔다. 하지만 헤밍웨이의 간명한 단편들과 적어도 세 편의 장편소설만은 산문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완성도에 가까우며, 카포티는 매혹적인 범죄 서사뿐 아니라 상당수의 초기 소설들을 남겼다.

후반부 카포티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명징한 산문체로 심오한 감정을 대가답게 전달하는 기술은 유명한 '크리스마스의 추억'과 그보다는 좀 덜 알려진 '추수감사절에 온 손님', 그리고 '어떤 크리스마스'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그중 가장 나중 작품인 '어떤 크리스마스'는 현대적 취향으로는 지나치게 감미로운 느낌이 있으나 무책임하고 관계도 소원했던 친아버지가 남긴 어린 시절의 상처를 선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진실과 감동을 동시에 준다. '크리스마스의 추억'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제럴딘 페이지가 뛰어난 연기를 보인, 잘 만들어진 TV 영화를 통해 접했겠지만 실제로 책을 읽은 사람들은 영화화된 작품에서는 보기 드문 걸작을 맞닥뜨렸다고 할 수 있다. 산문의 순수한 명징성과 계속 이어지는 서사적 리듬을 영리하게 사용한 경제성을 이용하여 카포티는 몇 안 되는 인물과 행동, 감정들에서 감상성을 제거함으로써 좀 더 경솔하고 미숙한 솜씨로 건드렸더라면 달콤하다 못해 궁상스러워질 법한 얘기를 구해낼 수 있었다. 이런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데 충분한 재능을 가진 작가로는 체호프 정도밖에 떠올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