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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모르는 별 이야기

corgan 2009. 7. 9. 02:34

지구인 13년차에 그 아이를 보았다. ‘그 여자’라고는 할 수 없는 게 그 아이도 그때는 열세 살밖에 안 됐다. ‘만났다’고도 할 수 없는데, 내가 그 아이를 본 게 그날이 처음인 것이지 우리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다거나 서로 눈길이 마주쳤다거나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990년 12월 18일 4시에서 5시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기나긴 사춘기가 시작됐다. 사춘기가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였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지구인은 하나도 없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날 이후 3년이 넘도록, 구제받지 못할 영혼의 감옥, 짝사랑 상태에 돌입하고 말았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위에서 질타가 쏟아졌다. 지구인들의 상호 교류 관습 중에는 그런 식의 감정이 발생했을 때 이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한 절차가 이미 마련되어 있으니 참고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절차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일단 상대에게 물어 봐서 저쪽에서 좋다면 더 친밀한 관계가 되고 그렇지 않다면 아예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게 무슨 ‘해결’이란 말인가.

나는 내가 발견한 생명체가 얼마나 경이로운가를 설명하기 위해 상세한 보고 자료를 위에 제출했다. 그런 위험한 도박을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내 보고서의 요지였다. 하지만 위쪽의 반응은 냉담했다. (‘위쪽’의 정체는 당연히 비밀이다. 당연히!)

“겨우 13년차 지구인이 그런 존재일 리 없잖아. 그리고 자네 인지체계가 아직 정상적으로 작동하지도 않는 마당에 자네 말만 믿고 그 개체를 데려갈 수는 없어.”
“납치하라는 게 아니고요. 야생 상태에서 좀 더 관찰하겠다는 건데요….”
“글쎄, 그 야생상태 때문이라니까. 자네, 13년차 지구 근무 요원 치고는 인지체계가 너무 엉망이야.”

맞는 말이었다. 아직도 그렇지만 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매일 보고도 이름을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봄이면 우리는 야외로 탐사 활동을 나갔다. 날씨는 별로였지만 봄소식은 풍성했다. 그 계절에 공원으로 탐사를 나가 보면 이름모를 꽃들이 잔뜩 피어 있기 마련이었다. 이름모를 꽃들…. 그게 문제였다. 지구인이 일부러 거기에다 아직 이름도 짓지 못한 희귀종만 갖다 심어 놓은 건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내가 꽃들을 전혀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올린 탐사 보고서에는 온통 이름모를 꽃들에, 이름모를 나무들뿐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천체관측을 할 때 나타났다.

“무슨 놈의 외계(우리 입장에서 보면 지구가 외계다) 탐사 요원이, 아는 별 이름이 하나도 없는 거야? 천체관측보고서가 이게 뭐야?”

사실 그건 아직도 그렇다. 다른 요원들은 ‘퍼펙틀리 클린 프레쉬 밸런싱 로션 - 컴비네이션 스킨’이나 ‘바이오 퍼포먼스 크렘 꽁뚜에 데 이으’ 같은 복잡한 명칭을 활용해 가며 탐사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하는데, 내 보고서에는 그런 것들이 그저 이름모를 화장품이라고만 언급되기 일쑤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나 ‘청동은입사포유수금문정병’ 같은 단순한 명칭조차도 내 보고서에는 그저 ‘유물’로만 표기되어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당시에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명색이 탐사요원인 주제에 별 이름을 전혀 모른다는 것과, 지구 인간들을 구별하는 척도가 너무 세밀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큰 인간, 작은 인간, 밥 주는 인간. 13년차 요원의 인지체계로는 분명히 부적합한 분류 기준이었다. 그런 것들은 하나도 모르는 주제에, 나는 훨씬 더 거창한 소재를 탐사하고 있었다. 지구인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삶과 죽음의 문제…. 그러니 위에서 좋아할 리가 없었다.

다시 1990년 12월 18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그 날이야말로 나의 어긋난 인지체계가 정상으로 되돌아오는 첫 순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구인을 분류하는 새 분류기준으로, ‘여자 인간’이라는 개념이 등장했고, 전에는 눈에 안 들어오던 별 하나가 눈에 확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1주일 전이었고, 우리는 크리스마스 때 부를 노래를 연습하기 위해 성당 부속 유치원 어느 교실에 모여 있었다. 못해도 한 30명은 되는 열세 살 작은 인간들 속에서 그 아이가 문득 눈에 띄었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그 아이를 본 게 그날이 처음은 아닐 텐데, 어째서 그때까지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걸까. 더 이상한 것은, 그래 놓고 왜 하필 그 순간에는 그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걸까. 역시 인지체계 문제였다.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이성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런데 그보다 더 괴이한 것은, 하필 그날 저녁에 어떤 별 하나가 갑자기 눈에 확 띄었다는 것이다. 지구인의 10진법 체계에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일몰 후에도 산수 보충학습을 받아야 했다. 학원에 가는 길에 육교를 건너야 했는데, 육교 위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건물들 사이로 정말이지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별 하나가 보였다.

‘아니, 매일 다니던 길인데 언제부터 저기에 저런 게 있었지?’

물론 그 별도 이름모를 별이었다. 북두칠성 말고는 아는 별자리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런 별을 모르고 지낼 수가 있었을까? 이해가 안 갔다. 저렇게 밝게 빛나는 별인데. 어떻게 그날까지 그 아이를 모르고 지낼 수 있었을까? 그날 이후 무려 3년 동안이나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던 존재를.

아름답기 그지없는 순간들이었지만 3년 동안이나 진행되는 짝사랑이라는 것은 그렇게 낭만적인 장면들만 가지고는 채울 수가 없는 법. 그 아이는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빛을 잃어갔다. 안 그래도 절망으로만 치달아 가던 내 사춘기 시절은 빠른 속도로 빛을 잃어가는 그 아이 때문에 점점 더 헤어날 길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불길한 징조는 또 있었다. 별이 안 보였다. 서쪽 하늘을 아무리 뒤져도 그때 그 별은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착각이었단 말인가. 잘못 본 건가. 그럴 리가 없었다. 사람이야 잘못 볼 수도 있다지만 어떻게 있지도 않은 별이 그렇게 반짝반짝 환하게 빛날 수가 있단 말인가.

인공위성을 본 거라는 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아니, 인공위성을 띄워서 그렇게 아름다운 별을 연출할 수 있다면 차라리 한 10개쯤 띄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열네 살짜리 인생이 이렇게도 암울하담. 야생상태의 지구인을 이해하기란 그만큼 어려웠다. 내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는데 다른 존재의 삶이 이해가 될 리가 없었다. 열다섯 살이 되고 열여섯 살이 되자 그 아이는 점점 이상하게만 변해 갔다. 어울리지 않았으면 싶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저러지 말았으면 싶은 머리 모양을 하고 성당에 나타났다.

“아니, 쟤가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거야?”

위에서는 또다시 질타가 계속됐다.

“입증해야 하나요?”

무슨 수로 입증한단 말인가. 사실 나 스스로도 확신이 사라져가는 시점이었는데. 하지만 정말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확신도 없으면서 왜 그 짓을 3년 동안이나 했단 말인가.

손가락이 열 개밖에 없는 지구인들의 독특한 10진법 수학체계에 점점 익숙해져 가면서 인지체계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사람을 볼 줄 알게 되고 이성이 눈에 들어왔다. 미적 감각이 생겨나고 ‘여자 인간’이 모두 똑같은 분류체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구에는 진짜로 ‘퍼펙틀리 클린 프레쉬 밸런싱…’ 같은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여자 인간도 있었다.

“그런데 하필 왜 걔야? 걔가 무슨 ‘바이오 퍼포먼스 크렘 꽁뚜에 데 이으’라도 되냐? 내가 보기에는 그냥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같은데.”

지구인 16년차가 되자 나도 더 이상은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제 그 아이는 그냥 평범했다. 평범한 인간 중학생 여자. 그 모습을 보면서도 3년이나 버텼던 건, 반짝반짝 빛나던 1990년 12월 18일 4시부터 5시까지의 그 아이 때문이었다. 그 경이로운 피조물. 그런 게 있다는 걸 처음부터 몰랐으면 모를까, 일단 그런 게 존재한다는 걸 알아버린 이상 그냥 맥없이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랬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이제 더 이상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놈의 별도 영 보일 생각을 안 하고.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지구인 16년차 생활도 막바지에 접어들던 시절. 우리 성당 신부님이 16년차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갔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딱 MT였는데, 그때는 그게 MT인 줄은 몰랐다. 심지어 술까지 마실 수 있었던 여행이었지만 신부님이 데려가는 여행이라 ‘밥 주는 인간’들도 전혀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아이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별을 보긴 봤는데, 별 감흥은 없었다. 도시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별이 보인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여전히 이름모를 별일 뿐, 특별히 가슴에 와 닿는 별은 없었다.

제발 저 헤어스타일은 좀 안 했으면. 그 아이도 여전했다. 이제 별로 가슴이 두근거리지도 않았다.

술을 마실 수도 있었으나, 술맛을 몰랐다. 대신 방 안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생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벌써 16년을 꽉 채웠으니 우리는 나름 지구의 삶에 관한 한 베테랑이었고, 대화 내용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아니, 한창 그런 이야기를 즐길 때였다.

밤이 깊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아이도 어느덧 대화에 합류했다. 조금 전에 바깥에서 본 별 이야기가 나왔다. 그 아이는 가만히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바로 그 대목에서 입을 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아이는 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학원에 갔다가 밤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언덕을 하나 지나야 되는데, 그 언덕을 넘어서는 순간 시야가 확 넓어지거든. 그러면 밤하늘이 눈앞에 촥 펼쳐져. 날씨 좋은 날에 보면 저 아래까지 별이 진짜 가득 차 있는데….”

바로 그 순간에, 그 아이가 다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넋을 잃고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멍했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는 먼 산 보듯 시선을 먼 곳에 고정시키고 하늘 가득 펼쳐져 있는 별 이야기를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자 인간 하나가 그 아이에게 말했다.

“방금 너 얼굴에 빛이 났어.”

진짜였다. 빛이 났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인 게 아니었다. 도대체 얼마만인가?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1990년 12월 18일 4시에서 5시 사이에 목격했던 바로 그 빛이 틀림없었다. 진짜였구나. 내가 틀린 게 아니었구나.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나는 이런 표현들이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았다. 내가 옳았다. 나만의 별 하나를 발견해 낸 기분이었다. 3년간의 기나긴 기다림을 통해 그 사실을 입증해 낸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순간, 짝사랑이 끝났다. 내가 본 게 헛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나는 드디어 기나긴 짝사랑의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그러면 1990년 12월 18일에 본 별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퍼펙틀리 클린 프레쉬 밸런싱’ 정도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화려한 광채!

지구인 17년차에 그 별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별이었다. 아니,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별에 그렇게 소박한 이름이 붙어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그렇게 유명한 별이었을 줄이야.

그 별은 금성이었다. 아주 특별한 조건일 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별, 태양계에 딱 두 개밖에 없는 내행성 중 하나였다. 공전궤도가 지구 공전궤도 안쪽에 있기 때문에 지구에서 보면 태양 근처를 맴도는 것처럼 보이는 별. 태양빛에 가려서 낮에는 안 보이고, 태양 근처에 있기 때문에 한밤중에도 볼 수 없다. 경우에 따라 새벽에 해가 뜨기 직전에 볼 수 있거나, 아니면 저녁에 해가 진 직후에만 볼 수 있는, 그것도 일년 내내 볼 수 있는 것도 아닌 별. 1990년 12월 18일은 그런 날들 중 하나였던 셈이다.

10년쯤 지난 뒤에 어찌어찌 해서 그 아이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낼 수 있었다. 느끼한 소리는 쫙 빼고, 간단한 인사만 써서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답장이 왔다.

그 뒤로는 연락을 안 했다. 역시 옛 추억은 그냥 묻어두는 법….

어느 날 ‘위쪽’이 홀라당 파산해 버리는 바람에, 지금은 그냥 평범한 지구인처럼 위장하고 저쪽 세계와는 아예 교신을 끊은 채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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